2016.10.30_[삶의 향기] 악덕의 본질은 나약함이다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악덕의 본질은 나약함이다

‘비선 실세’나 ‘문고리 권력’, 심지어 ‘순장조’라는 어처구니없는 단어들이 연일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판단을 해도 모자랄 시국에 온갖 ‘비선 실세’가 마치 도술을 부리듯 국정을 쥐락펴락해 온 상황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한다. 통치자의 그 놀라운 의존성의 비밀은 무엇일까.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스스로 결정할 가치와 신념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릇된 권력이나 비상식적인 점술에 의존한다. 모든 사이비 점술은 자신의 나약함을 비합리적 믿음으로 은폐하려는 정신의 굴종이다. 강인한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강인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자기감정을 통제할 힘을 갖고 있으며,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판단의 근거를 타인의 권위가 아닌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안다.

위대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뜻밖의 겸허함이 있듯이, 사악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뜻밖의 나약함이 있다. 위대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고, 질문하고, 타인의 의견을 들으려 하는 것에 비해 사악한 사람들은 걸핏하면 특권을 휘두르고, 잔인한 토사구팽을 일삼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색출해서 엄벌하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그들이 휘두르는 그릇된 힘에 속아서는 안 된다. 힘이 진정 자신 내부에서 나온다면 그는 결코 힘을 흉기처럼 휘두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통치자’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은 모두 적’이라는 식으로 작동하는 카리스마의 대가는 결국 독재나 부정부패일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정치인은 통치의 힘이란 철저히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알고 있는 자, 권력을 세상에서 가장 얇은 유리잔처럼 조심스럽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굳이 카리스마가 필요하다면 소통하는 카리스마나 합리적인 카리스마여야만 한다. 불통의 카리스마, 신비와 주술에 의존하는 카리스마는 결국 독재와 부패로 귀결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틀린 판단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치명적인 오류의 위험에서 보호해주는 마지막 보루다. 예컨대 여기 당신이 ‘꼰대’인지 아닌지 실험하는 리트머스지가 있다. 당신이 어떤 의견을 말할 때 당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대놓고 반대를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1번, 무조건 기분 나쁘다. 2번, 섭섭하지만 내 잘못을 돌아본다. 3번, 쿨하게 내 잘못을 인정한다. 1번이라면 당신은 분명 꼰대이고, 2번이라면 당신은 건강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3번이라면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 사회 지도층은 주로 1번을 선택하는 ‘아재들’로 구성돼 있다. 내 오류를 지적하는 이의 날카로운 공격이 섭섭한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럼에도 합리적 이성과 부드러운 공감의 힘으로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존중할 때 생활 속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소수의견이나 반대의견은 민주주의의 흙이자, 물이자, 공기 같은 존재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대한 복종이 아니며, 내가 투표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5년 동안 입 닥치고 복종해야 하는 제도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들을 존중해야만 겨우 유지될 수 있는 지극히 섬세한 생명체와도 같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자기 문제 하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이사를 갈지 안 갈지, 유학을 갈지 안 갈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할 수 없을 때마다 점집을 찾는다면 어떻게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약한 고리’를 노리는 그 어떤 비선 실세도 우리의 중요한 문제를 휘두르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릇된 권력이 우리를 조종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끈질기게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신문을 읽고,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타인과 대화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령스러운 주술이나 족집게 예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불의와 싸울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이, 허위를 폭로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가 필요하다.

정여울 작가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악덕의 본질은 나약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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