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013_러브레터 (1999) 이동진기자의 글

‘러브레터’의 1인2역 모티브

개봉 20일을 넘기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와이 순지의 일본영화 ‘러브레터’는 참 깨끗하고 정갈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산악 사고로 죽은 애인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못해 그의 중학시절 주소에 편지를 써보내는 20대 여성 히로코가 뜻밖에도 답장을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답장을 보낸 사람은 공교롭게도 똑같은 이름을 가져 중학교 때 허다한 에피소드를 낳았던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습니다. 이와이 순지는 한 남자가 떠나간 뒤 그렇게 두 여성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를 추억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러브레터’는 마주지치 못한 채 홀로 빛나는 순간들의 아름다움이 핵심입니다. 떠난 사람이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은 지극히 짧을 뿐이지만 흔적은 도처에 남는다는 것, 남겨진 사람들은 그 흔적들을 회상하며 온기를 얻는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눈 벌판 속 남아있는 잠자리 모습이 이 영화의 핵심적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지난 11월 감독이 내한해 조선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가질 때, 약간의 의례적인 질문을 하고난 뒤 제가 제일 먼저 던진 물음은 “왜 두 여성을 한 사람이 연기하도록 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그는 처음엔 히로코는 화면에 그리지 않고 편지만으로 처리하려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꿨기에 그냥 여자 이츠키를 연기하기로 했던 주연배우 나카야마 미호에게 그 배역까지 맡겼다고 간단히 답했지요.

그러나 감독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하지만 관객의 능동적인 해석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러브레터’의 1인2역 상황에서 실로 많은 의미를 캐낼 수 있습니다. 애인이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잊지 못하던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와 편지를 나누며 마침내 그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리움이란 멀리 있는 것을 안타깝게 끌어들이는 인력(人力)같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것을 마음의 부담을 덜면서 더 빨리 밀쳐내는 척력(斥力)에 가깝지요. 그게 아니라면 그건 차라리 멀어져버린 것을 인정하는 체념같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 어린 시절 남자 이츠키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까맣게 몰랐던 여자 이츠키가 옛일을 추억하면서 서서히 마음 속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나가니까요. 이때 1인2역은 한쪽에선 떠나보내고 한쪽에선 맞이하는 과정을 하나의 몸에 담아냄으로써 세월이 세상에 남기는 두 종류의 운동방향이 결국 둘이 아님을 절묘하게 상징하지요. 한 사람이 평생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한 명 뿐이라는 연애론까지 말입니다.

‘러브레터’는 한 여자가 서랍을 정리할 때 다른 여자가 비밀 서랍을 새로 열어보게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히로코가 애인에게 안부를 묻는 메아리를 통해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끊어 보낼 때, 여자 이츠키가 누워서 그 말을 되받는 장면을 교차편집함으로써 영화는 주술처럼 그 과정을 수행합니다. 여주인공이 종반부에서야 알게 되는 집 마당 이츠키란 이름이 붙었던 나무의 존재는 추억의 아름다운 전이(轉移)을 완성하는 종결부호같은 것이지요. 남자 이츠키가 중학교 때 남겼던 대출카드 뒤 그림을 발견하는 라스트신은 이를 축복하는 축전(祝電)같은 것일테고요.

‘러브레터’는 찬찬히 살펴보면 이렇게 ‘밀고 당기는’ 구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얼굴이 같은 두 여자라는 설정과 함께 이름이 같은 두 남녀라는 상황 역시 감독의 이런 생각을 성실히 변주하지요. 심지어 영화 속 제3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정서적 배경인 눈(雪)같은 자연조차 그렇게 짜여 있지요. 눈은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포용할만큼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두 남자의 생명을 앗아간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니까요. 감독은 폐렴으로 눈보라 속에서 죽어갔던 이츠키 아버지 대신 똑같은 상황 속에 이츠키를 넣고 살려내기까지 하지요.

정말 세상사엔 절대적 손해나 이익은 없고, 행복과 고통의 총량엔 아무 변화도 없는 듯 합니다. 떠나는 것은 돌아오는 것과 배턴을 주고받기 십상이고, 상실되는 것은 새로 생기는 것과 맞교대하기 마련이지요. 한해의 끝이 가까와질수록, 돌이켜보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요.

1999년 12월 10일자 조선일보 이동진기자의 시네마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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